

태국 카렌 침례총회 실로암신학교에서 교수로 있는 중에, 미국에서 한 학생이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미국 시민권을 가졌다는 '뻐대와'라는 이름의 청년은 미국 워싱턴 주에서 온 카렌 디아스포라였다. 처음 마주했을 때 그의 겉모습에서는 미국인이라는 인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느 학생과 같이 단순한 옷차림에 노란 타마린드(Tamarind) 나뭇가루를 얼굴에 바른 전형적인 카렌 학생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뻐대와는 부모님이 버마에서 살다가 전쟁을 피해 태국의 '매라모'라는 난민촌으로 피신하였고, 자신은 그 난민촌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UN에서 인정해 주는 '실향민' 신분, 즉 고향을 떠난 피신자(displaced people)였다. 뻐대와는 태국에서 태어났지만 태국 국적도, 부모의 국가인 버마 국적도 없는 무국적 신분이었다. 그렇게 10년을 난민촌에서 보낸 뻐대와는 태어난 나라에도 부모의 나라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결핍 속에 지냈다고 한다. 나도 그 난민촌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기에 그 삶이 얼마나 소외되고 어려운 삶인지를 알고 있었다.

뻐대와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난민촌에서 지내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미국 정부가 뻐대와의 가족을 난민으로 받아주면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한순간에 갑자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시민이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난민에서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새로운 나라에서 가족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향한 곳은 시애틀에 있는 카렌 공동체였다. 그러다 부모님이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워져 워싱턴으로 이사를 간지가 어느덧 10년이 되었다고 한다. 이제 뻐대와의 가족은 미국에 정착하여 현재 어머니는 일식당, 아버지는 정육점에서 일을 하신다. 그리고 카렌 교회에서 카렌 디아스포라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 뻐대와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짧은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무국적자에서 미국 시민권자라는 변화를 겪은 것만으로 그가 얼마나 극단의 인생을 살아왔을지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뻐대와의 이야기를 들으며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뻐대와의 가족이 시애틀에 처음 정착할 때 가족에게 도움을 주신 분과 내게 카렌어를 가르쳐준 카렌어 선생님이 동일한 분이었던 것이다. 그분의 성함은 '매기 포'로, 사연 많은 카렌 여성 지도자였다. 그분의 아버지는 카렌 정부(Karen National Union)의 고위직이었는데, 1996년 버마군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어 가족이 급하게 태국 치앙마이로 피신하게 되었다. 마침 나는 그 당시 1년 반 동안 태국어 공부를 마치고 1997년 치앙마이로 향한 시기였는데, 매기포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2년 동안 카렌어를 배울 수 있었다. 이후에 그분은 미국에 난민 신분으로 갔지만,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까지 연락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런 매기포 선생님이 뻐대와 가족이 미국에 정착할 때도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당시 시애틀에서 담임목사였으며, 뻐대와 가족은 2년 동안 그분에게 영적으로 돌봄을 받았다고 한다. 매기포 선생님의 가족도 여러 사연이 있지만, 그분은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다른 카렌들을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끌어주셨다. 내가 매기포 선생님에게 카렌어를 배운 시기는 뻐대와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도 2023년 태국 어느 신학교에서 별개의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한 사람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나는 즉시 매기포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고 일체감을 느꼈다.
뻐대와와의 대화가 계속되면서, 주제는 곧 '디아스포라'로 향했다. 뻐대와는 올해 워싱턴에 있는 헤리티지대학교를 졸업하고 6개월 정도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이곳에 왔다고 했다. 고향을 떠나 수차례 이주를 경험한 그는 '디아스포라' 그 자체였다. 나 역시 고향을 떠난 일종의 디아스포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디아스포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기가 막히게 이루시는지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뻐대와에게 제안을 건넸다. "너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디아스포라로서 디아스포라에 의한, 디아스포라를 위한, 디아스포라와 함께 하나님의 선교를 해보지 않을래?" 그러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겠다고 밝은 모습으로 대답했다. 이에 나는 뻐대와에게 마침 미얀마에서 온 또 다른 디아스포라 학생 '아무'를 위해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는 미래에 대비하여 영어를 배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뻐대와는 주저 없이 가르쳐주겠다고 했고, 우리는 잠시 사무실에서 만나서 앞으로 어떻게 공부할지 나누었다. 두 디아스포라를 통한 하나님의 일이 기대된다.
뻐대와가 살아온 23년의 짧다면 짧은 인생 여정 속에는 많은 사연이 있다. 난민촌에서의 생활 그리고 갑작스러운 미국 정착까지 모두 그가 계획하지 않은 삶이었을 것이다. 어렵게 생활하다가 미국에서 안정적인 삶을 경험하면 그 속에 안주하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도, 뻐대와는 미국에서의 안락함 대신 다른 길을 선택했다. 중학교 때 목회자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가 목회자로 헌신을 한 것이다. 뻐대와의 체구는 작지만 그의 내적인 영성은 결코 작지 않다. 편안한 미국 생활이 아닌 목회자로서 하나님과 이웃들을 섬기고자 하는 그의 결심에서 그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인생 여정을 이끄심은 참 다양하고 신기하다. 그 모습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은 선교사로서 큰 특권이다.
오영철 선교사 _ GMS 파송선교사, 아신대학교(ACTS) 연구교수, 태국카렌침례총회-실로암신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