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이주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한다. 기독인에게 크리스마스란 친척 및 친구들과의 의미 있는 재회의 시간이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과 고립되었다는 느낌은 두려울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이동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영향을 미칠까? 요한1서 4장 7~21절의 말씀은 이런 우려에 대해 성탄절의 본질을 신성한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크리스마스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고 있다.


첫째로, 성탄절은 하나님의 포용적인 사랑을 나타낸다. 누군가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손을 뻗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전혀 듣지 못한 것일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 자녀, 친척, 친구, 동료, 이웃 등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적용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9절에 나오듯 “세상”에 향하는 것이며 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특정 민족과 집단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영생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포용적인 것은 차별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사랑을 혼자 간직하려 하고, 어떤 이들은 배신당하는 것이 두려워 사랑하기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혹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에만 사랑을 주는 선택적인 사랑을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선택적이지 않다. 그분의 사랑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살아야 할 필요성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 영생을 향한 필요성은 우리의 지위, 배경, 성취, 인종, 계급과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파산한 상태여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용서받아야 할 죄인임에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갈보리 십자가는 악의 물결에 휩쓸린 사람들과 세상의 모든 죄인을 품는다.


두 번째, 성탄절은 하나님의 변혁적 사랑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류에게 알려진 모든 형태의 사랑을 대신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아들을 내주기까지 하는 사랑이다(요 3:16).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수가 그의 사명에 실패했다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보내진 것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절) 하나님께서 친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선포하며 예수를 대중에게 소개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없애시려고 예수를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한 죄의 용서가 우리 마음에 강한 확신을 심어주는 것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18절)고 하였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심판에 직면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재즈음악가 지미 오웬스(Jimmy Owens)는 “그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He Died for Us)”라는 그의 노래 가사에서 “굳건한 벽이 있었다. 그 벽은 우리의 모든 불결함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피로 벽을 부수고, 고여있는 것을 터뜨리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상처에서 고름을 짜듯이 인류에 새살을 돋게 하셨다”고 표현했다.


셋째, 성탄절은 하나님의 광범위한 사랑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포용적 사랑이 편애와 차별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변혁적 사랑이 주는 것과 받는 것을 모두 특징으로 하는 한편, 하나님의 광범위한 사랑은 온갖 경계와 영역을 초월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특정 민족만이 아닌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보내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범위에 지리적, 민족적 한계가 없다(9절, 14절). 죄의 확산은 하나님의 광범위한 사랑을 해결책으로 한다. 사람들은 어디서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의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소외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3일째 되는 날에 부활하셔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15~16, 19~21절). 하나님의 사랑은 시공을 초월한다. 요한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5절)고 선언한다. 여기서 “누구든지”의 정체성은 전 세계적으로 열려 있다. 하나님의 광범위한 사랑은 모든 종류의 경계를 초월한다. 디아스포라로 사는 사람이나 고국에 살고 있는 누구에게든지 동일하게 적용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어느 미군 부대가 독일에 배치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미군이 강하게 저항하던 독일군에게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숨지는 일이 일어났다. 전사자의 친구였던 두 명의 군인에게는 시신을 묻을 수 있는 공동묘지를 찾아 전쟁 후 유해를 수습할 수 있도록 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두 군인은 폭우 속에서 사망자를 어깨에 메고 몇 마일을 걸어 가톨릭교회가 소유한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전사한 병사가 개신교 신자라는 것을 알고, 신부는 “죄송합니다. 그 묘지는 가톨릭 신자만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개신교도가 있을 곳이 없습니다”라고 거절하였다. 결국 신부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두 병사는 전사한 병사의 시신을 묘지 울타리에서 불과 몇 인치 떨어진 곳으로 가져갔다. 그들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밤이 깊었지만, 두 병사는 간신히 얕은 무덤을 파고 기도를 한 뒤 죽은 동료를 묻었다. 떠나기 전에 그들은 표식으로 무덤 위에 나무 십자가를 놓았다.


전쟁이 끝난 후, 전사한 군인의 부모는 독일에서 아들의 유해를 집으로 가져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당시 시신을 묻은 두 명의 군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이 가톨릭 묘지에 도착했을 때, 두 병사는 친구가 묻힌 무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무덤을 찾지 못해 결국 교구 신부를 찾아가 물었다. “우리가 친구를 묻으러 왔던 밤을 기억하십니까? 신부님은 묘지에 친구를 묻는 것을 거절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울타리 바로 바깥에 친구를 눕히고 나무 십자가를 표지로 세웠습니다. 혹시 무덤이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노신부는 묘지를 뒤덮은 숲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눈시울을 붉히며 “그날 밤 나는 여러분의 행동에 감동 받아 가톨릭 묘소의 울타리를 연장하여 매장된 병사 묘를 울타리 안에 있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의 울타리를 움직여 용서가 필요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상황이나 거주지에 상관없이 포함시키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포용적 사랑의 깊이를 전부 다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의 변혁적 사랑의 힘도 충분히 가늠하지 못하고, 그분의 광범위한 사랑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성탄절에 하나님의 사랑의 경이로움과 그 힘을 경험할 수 있다.


Dr. Tereso Casino • Gardner Webb University 선교학 교수

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