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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로잔디아스포라 카탈리스트 샘 조지 박사




세계적 이주현상은 우리가 기존에 이해하던 선교적 사명과 기독교 신앙을 재정립하고 있다. 이에 맞춰 우리는 21세기 기독교 맥락을 고려하여 대표적인 선교용어 ‘Go’와 ‘Send’를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GO와 SEND라는 용어는 사고의 본질적 편견을 내재하고 있으므로, 기존의 함의에서 더 나아가 ‘양방향성’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선교는 더 이상 서구와 같은 특정 지역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세계 어느 곳에서든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디아스포라신문은 로잔디아스포라의 카탈리스트인 샘 조지 박사(Dr. Sam George)와 대담을 나누었다.


― 기독교 맥락에서 GO와 SEND의 의미는 무엇인가?


샘 조지 박사(이하 샘): GO와 SEND는 근본적으로 방향성을 전제하는 용어로, 여러 국가에서 공통으로 ‘여기서 저기로의 이동’을 가리킨다. 기독교 관점에서는 선교의 시작을 의미하는 용어로 적용하여 일종의 패러다임으로 굳건히 자리 잡기도 했다.


한편, GO와 SEND 외에도 COME과 RECEIVE라는 또 다른 방향의 표현이 있다. 이는 단어 그대로 ‘가고 보내는’ 것과 반대로 ‘오고 받는다’는 의미이다. 누군가 먼 곳에서 출발하여 내 근처에 도달하는 것을 COME이라 하듯, COME은 GO와는 달리 이동 없이도 상대와 나의 거리가 좁혀진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상대와 가까워지는 것이 COME-RECEIVE인 것이다. 그러나 내 곁에 가까이 온 이가 선교의 주체이든 선교의 대상이든지 간에, 그 사람이 (잠재적) 선교사라는 인식은 전반적으로 떨어진다. 왜냐하면 대다수가 여전히 GO-SEND 패러다임으로 선교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현대 선교운동은 GO 패러다임에 중점을 두고 시작되었으며, 20세기 후반의 선교 추진력은 SEND 패러다임에서 비롯되었다. 선교 관련 저술은 GO-SEND를 기반으로 정교한 신학과 선교학을 발전시켰지만, COME-RECEIVE의 선교 패러다임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선교활동이 서구중심 사고에 사로잡혔고 이주자를 선교의 가능성에서 배제했다. 또한 서양 제국주의 확장에 성경적 정당화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선교 문헌을 일방적인 관점으로 해석하여 편견을 재생산하는 데 일조했다.


―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는가?


샘: 사도바울이 선교를 서쪽으로 선회한 이유는 마게도냐 사람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호소에서 비롯되었다(행 16:9). 마게도냐 사람의 오라는(COME)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가는(GO) 선교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처럼 선교의 GO 모델이 COME 모델과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지 않는 한, GO만의 접근 방식은 억압적이고 착취적이며 호전적이게 된다. 이는 GO-SEND 패러다임이 주로 단방향 및 일방적인 관점에서 인식되어왔기 때문이다.


최근의 COME-RECEIVE 선교 패러다임에는 △환대 △이민자 교회 △디아스포라 선교 △난민 사역 등이 포함된다. 우리는 선교가 ‘가는 것’만이 아니고, 또한 세계의 특정 지역으로 ‘보내는 것’만이 아님을 깨달을 때, 우리가 현재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보다 포괄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 최근 남반구 교회의 선교적 약진이 눈에 띈다.


샘: 남반구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그곳의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와 연결되고 있다. 선교는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다양하게 연결될 때 더욱 탄력을 받는다. 다국적 협력이 그 어떤 선교전략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수세계(Majority World) 선교와 신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지난 수십 년간 아프리카·아시아·중남미 등지에서 기독교가 눈부시게 성장하였고, 선교흐름은 역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과거에 선교대상지였던 나라들, 예컨대 한국·필리핀·중국·인도·케냐·싱가포르·나이지리아·브라질과 같은 나라가 선교사 파견 국가로 부상한 것이다. 이외에도 전 세계의 많은 이주민들이 고국을 포함한 각지로 나아가 대위임령에 응답하고 있다. 일부 선교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역파송’ 개념으로 설명하며, 유럽의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이 그 실례이다. 비서구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계속하여 이주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이민을 포함한 모든 수단(교육·직장·안전상의 이유 등)이 동원되고 있다. 마치 서양 선교사들이 지난 2세기 동안 선교지로 향하기 위해 식민지 제도에 편승했듯이 말이다.


선교 패러다임의 전환은 단순히 선교 방향을 바꾸는 것 외에도 고착되었던 패권적 성향을 탈피하려는 노력과 관련이 있다. GO와 COME 패러다임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은 권력, 돈, 훈련, 지배 등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결국 단일적이고 단방향적이었던 기존의 방식을 뒤로 하고, COME-RECEIVE 패러다임을 통해 새로운 담론이 만들어졌다.


― 향후 30년의 선교 흐름을 예상해본다면?


샘: 앞으로는 전 세계의 모든 지역이 최소한의 교차문화적, 최대한의 동일문화권의 선교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는 곧 현지인에 의한 현지선교이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에서 온 (잠재적) 선교사를 수용하는 패러다임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시점이다.


19세기에 미국 최초의 해외 파송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이 미얀마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면, 현재는 수만 명의 미얀마인들이 난민 신분으로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일부 추정에 따르면 이들 중 90%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으로 온 미얀마인들은 선교단체에 의해 파송되거나 교회로부터 지원받아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군부 쿠데타와 종교적 박해를 피하여 온 난민으로서 그저 무자비한 인종청소를 피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거주하며 자신을 선교사로 여기거나 전도를 목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효과적인 선교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성경이나 선교에 대한 훈련을 받지 않았어도 기독교 신앙을 몸소 주변에 보이고, 때로는 예수님을 직접 증거하기도 한다.


선도적인 선주민들은 이러한 미얀마 난민들의 선교활동에 도전받고 있으며,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있다. 이처럼 다른 나라에서 우리의 곁으로 온 이들을 (잠재적) 선교사로 수용할 때, 새로운 선교 활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선교사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주민에 의한 선교가 앞으로의 선교 패러다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담을 마치며


사람들은 이동하면서 의도와 상관없이 출신 지역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내기 때문에, 이주는 역이동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여기에 있다”는 표현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당신이 가는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당신이 있던 곳으로 올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교역하고, 여행하고, 미디어를 소비하고, 분쟁하고, 외교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웃으로 나타나게 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곧 우리의 종교적 풍경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우리 사회를 재구성할 것이다. 글로벌 초연결과 초이동성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기독교의 맥락을 돌아보고 다시금 구성하는 행위는 불가피하다. 다중심주의를 향한 관점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선교가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흘러가는 양방향의 사역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상호주의를 따라야 할 때이다.


정리: 문창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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