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함께 걷기, 느리게 걷기



 

“이주민들을 위한(for migrants) 사역을 넘어, 이주민과 함께(with migrants) 사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가 섬기는 시티센터교회는 울산교회에서 영어예배부로 약 15년간 존재하다가 ‘이주민과 함께하는 선교(mission with migrants)’의 모델로 개척된 교회이다. 중대형 규모의 교회 안에서 영어예배부로 있을 때는 본 교회의 안정적인 재정 지원, 원활한 봉사자 확보, 자유로운 공간 및 차량 사용 등 사역에 다양한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리더십·봉사·헌금·전도·부서 내 의사 결정 등 사역의 대부분이 한국인 봉사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청년부 예배가 동시간 대에 진행되어서 영어예배부에 참석하는 한국인 봉사자들의 연령대가 높은 점, 봉사자들이 영어로 이주민 멤버들과 의사소통이 어려운 점 등 아쉬움도 있었다.


이에 필자가 영어예배부 담당 교역자로 부임하면서 ‘봉사자(helper)’라는 호칭을 없애고 한국인을 ‘한국인 멤버(Korean Member)’로, 영어권 이주민들을 ‘영어 멤버(English Member)’로 호칭을 변경했다. 또한 리더십, 의사결정, 봉사 등 많은 부분을 이주민 멤버들에게 이양하는 과정을 통해서 한국인과 이주민 성도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섬기는 공동체가 되도록 변화를 시도했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한국인은 섬김의 주체, 이주민은 섬김의 대상’이라는 뿌리 깊은 인식을 바꾸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는 울산교회의 경우만이 아닐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이주민선교는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되어 왔다. 하나의 축은 한국인 중심·한국인 주도의 선교, 즉 ‘이주민을 위한 선교(mission for migrants)’의 형태이다. 또 다른 한 축은 이주민들이 중심이 되어서 한국인은 거의 없이 이주민들로만 구성된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형태, 즉 ‘이주민에 의한 선교(mission by migrants)’라고 할 수 있다.


두 축의 모습은 언뜻 상반되어 보여도, 한국인과 이주민이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상호 간에 섬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양상을 띤다. 일부 한국교회는 언어와 민족 별 예배모임을 따로 갖도록 이주민을 배려(?)한다. 또한 여건이 되면 다양한 재정과 자원을 투자하여 한국인 성도가 예배드리는 공간과 분리된 곳에 ‘이주민센터’ 또는 ‘이주외국인 선교센터’ 같은 별도의 공간을 마련한다. 그런데 정작 이주민들 중 상당수는 본 교회 한국 성도들과 같은 공간,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교제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이주민을 위한(for) 선교는 잘하고 있을지 모르나, 이주민과 함께하는(with) 선교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울산교회 영어예배부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이주민들은 한국교회와 한국 멤버들이 베풀어주는 사랑과 헌신에 정말로 고마워했지만, 여전히 한국인과 이주민 사이에 존재하는 수직적인 문화와 서로 충분히 교제하지 못하는 데 있어 아쉬움을 느꼈다. 그들은 부모에게서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마치 내리사랑보다는 상호 간에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 함께 섬기는 동반자적 관계를 원한 것이다.


그래서 여러 논의와 기도 끝에, 또 하나님의 섭리로 여러 가지 교회 안팎의 환경이 잘 조성된 덕분에 2019년 1월, 영어예배부가 울산교회에서 분립되어 울산의 도시 중심지(울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중앙길 91)에 지금의 시티센터교회로 개척되었다. 처음 개척할 당시에는 필자의 가족을 제외하고 한국인 멤버들이 4명, 영어 멤버들이 약 25명이 있었다. 몇몇 분들은 한국인 ‘봉사자’들이 개척팀에 참여하지 않는 것에 대해 걱정했지만, 오히려 필자는 ‘봉사자’로 오려는 분들을 사양하고 봉사자가 아닌 ‘예배자’로 와달라고 했으며, 우리 영어 멤버들도 “우리가 봉사할게요. 우리가 한국인들을 섬길게요!”라며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한국인 멤버들을 위한 한국어 예배에 영어 멤버들이 예배 안내로, 미디어로, 찬양으로 더 적극적으로 사역을 섬겨준 것이다.


영어 멤버들의 이러한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사역 참여의 결과로 한국인 멤버들이 계속 늘어나게 되었다. 처음 교회를 방문한 분들이 기존 한국교회에서 느낀 적 없는 밝고 따뜻한 분위기,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통일시키지 않으며 있는 모습 그대로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환대의 분위기에 매력을 느끼고 감동을 받았다. 무엇보다 율법주의 또는 율법폐기주의적인 메시지가 아닌 복음 메시지에 은혜를 받은 이들이 교회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금은 한국인 멤버와 영어 멤버 구성 비율이 약 6:4 정도가 되었다. 이처럼 시티센터교회는 이주민과 한국인이 동등한 위치에서 ‘이주민과 함께하는 선교’의 모델로 느리지만 함께 선교 공동체를 이뤄가고 있다.


시티센터교회는 ‘더디게 가더라도 함께 가는 공동체’, 즉 ‘더함’ 공동체를 추구한다. 교회성장학자 도널드 맥가브란은 교회 성장과 선교의 효율성을 위해서 인종·언어·문화 등이 같은 동일집단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방식, 이른바 ‘동질집단원리(Homogeneous Unit Principle)’를 소개했다. 이 원리는 선교 현장에서 매우 실제적이고 효과적이며, 이런 원리를 따라 많은 국내 이주민선교가 앞서 소개한 것처럼 ‘이주민을 위한(for) 선교’ 또는 ‘이주민에 의한(by) 선교’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시티센터교회는 한국인과 이주민이 ‘함께'(with)하는 것이 성경과 우리의 신앙고백에 더 충실할(faithful) 뿐 아니라 선교적으로도 더 결실한다(fruitful)는 믿음 하에, 비록 속도가 늦을지라도 함께 걸어가는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사실 사역을 하면서 더욱 느끼는 것은 이주민과 함께하는 선교는 매력적으로 들리나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인 위주의 선교는 시간적·재정적·문화적으로 참여와 헌신이 용이하고 이미 선교훈련을 받은 이들이 동원되어 열심과 열정이 넘치는 등 사역의 여러 면에서 이점이 있다. 반면 이주민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기에 재정적인 헌신이 어렵거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고 한국 가족들과 직장 상사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경우도 많다. 많은 면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고, 한국인과 같은 선교에 대한 지식, 훈련, 열정, 헌신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이주민과 함께 선교하기란 제약이 많고 빨리 가기 어려운 길이다.


두 그룹 사이의 문화적 장벽과 차이는 함께 걷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한국 사회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서 단기간에 빠른 성장을 이뤄냈으며, 이런 경제 효율성과 속도를 우상화하는 소비주의 문화는 한국교회 안에도 들어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한 옷이 되어 버렸다. 그 반면 사회의 속도가 비교적 느리고 철저하게 관계 중심적인 대부분의 이주민은 이런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적응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이렇듯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 이주민들과 함께 걸어가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역의 효율성과 성공, 교회 성장의 속도를 우선으로 고려한다면 어쩌면 따로 걷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사역을 하면서 그런 유혹이 들 때가 있다. 혼자 하고 싶은 유혹, 따로 가고 싶은 유혹이다. 마음이 잘 맞고 생각이 통하는 사람, 동일 언어와 문화권의 사람과 선교하는 것은 가치관과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빨리 갈 수 있다. 사역자 혼자 또는 선교의 열정과 재능이 있는 소수의 사람만 데리고 선교한다면 더 빠르고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구성원들 안에서 선교의 부르심과 열정을 불러일으켜 각자 선교적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치고 격려하면서 함께 선교하는 것은 더 느리고 오래 걸리는 과업이다. 목표 지향적이고 성과 지향적이며 인내심이 부족한 필자는 계속해서 그런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어쩌면 광야의 지도자 모세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그리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광야를 걸어가야 했다. 어린아이들과 노약자 등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걸음은 도무지 빨리 걸어갈 수 없는 걸음이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지나는 약 640km의 광야 길(직선거리는 320km)을 그들은 40년간 걸어갔다. 그들의 행진 속도는 시간당 겨우 1.8m/h 정도였고, 하루에 겨우 44m/d 정도 전진하는 속도였다. 얼마나 느린가! 거북이도 그보다는 빠를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걷기 위해, 느리게 걸었다. 비록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결과로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고, 그들의 행진 속도는 끝까지 느렸지만, 함께 그리고 느리게 걷는 40년 동안 하나님은 그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지하는 것,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었다. 또 그들의 마음을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의 목자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을 그분께서 친히 시켜주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모세보다 더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그분의 걸음은 더 느렸다. 그분도 얼마든지 혼자 사역하실 수 있었지만,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참아가며 느린 속도로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셨다.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베다니까지 3.2km의 거리를 가는 데 이틀이나 걸리셨다. 곁에 있던 제자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마르다와 마리아도 장례식장에 늦게 도착하신 예수님을 원망할 정도였다. 그분은 사역하시는 동안 주변 사람들의 다급한 재촉에도 언제나 느긋하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여유를 보이셨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으신 그분은 한 번도 조급한 적이 없으셨다. 그분의 선교는 누군가의 눈에는 너무나 더디고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으로 보였겠지만, 철저히 소수의 제자들과의 관계에 집중한 그분의 느리게 걷는 사역은 오늘날 세계선교의 현장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열매 맺고 있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성장을 경험한 한국교회는 지금도 이주민선교를 위해 바쁘게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for God) 얼마나 바쁜지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과 함께(with God)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할 때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존재(being)는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doing)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주민들을 위한(for migrants) 사역을 넘어, 이주민과 함께(with migrants) 사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주민선교의 길을 혹여 한국인 사역자, 한국인 봉사자들만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주민선교 역사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각종 선교의 비전과 전략을 말하는 자리에 이주민(외국인) 사역자들의 설 자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는 이주민 사역자, 이주민 성도들과 함께 걷기 위해 느리게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셨듯이, 이주민 사역자와 성도들이 이주민선교의 주체와 파트너가 될 수 있도록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자리를 비켜주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30년의 ‘이주민 선교 시대’는 한국인들이 주체가 되는 ‘이주민을 위한 선교(mission for migrants)’나 디아스포라 이주민들이 주체가 되는 ‘이주민에 의한 선교(mission by migrants)’를 넘어서, 한국인과 이주민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파트너로 존중하며 함께 걸어가는 ‘이주민과 함께하는 선교(mission with migrants)’를 향해 나아가야 할 때다. 한국인이건 이주민이건 관계없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복이 되시기 위해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이 땅에서 이주민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영적 이주민들이다. 우리는 한국인과 이주민이라는 구별과 차이를 넘어 그리스도인, 영적 이주민, 천국 시민권자라는 제3의 정체성 안에서 하나 될 수 있고, 함께 걸어갈 수 있다. 제3의 정체성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될 때, 앞으로의 한국 이주민선교는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이주민으로서의 선교(mission as migrants)’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신치헌 목사 • 시티센터교회 담임, Ulsan Global Friends 대표, Gospel City Ministry 운영위원

댓글 0개

Opmerkingen


bottom of page